[소준환의 영화 초이스]'곡성', 감독의 의도는 무엇일까

기사 등록 2016-06-03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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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데일리 소준환기자]'곡성'은 나홍진 식 스릴러의 결정판이다. 나홍진 감독의 전작인 '추격자'와 '황해'도 영화팬들 사이에서 큰 인기와 호평을 받아왔으나 '곡성'만큼의 독보적인 몰입감을 선사하진 못했다. 그야말로 '곡성'은 나홍진이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는지를 드러낸 집약체인 것.

보통 선과 악의 경계는 뚜렷하다는 게 일반적인 생각이다. 그렇지만 '곡성‘은 선과 악의 경계를 혼돈케 하는 방식을 통해 압도적인 섬뜩함을 이끌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작품은 구성과 배치, 연기력과 섬세한 표현 등을 비롯해 감독이 공을 들인 흔적이 곳곳에 담겨져 있다. 여기에 '곡성' 특유의 '열린 구조' 와 메타포는 영화를 접한 후인 관객은 물론 관람 전인 예비 관객들에게까지 의문과 관심을 자아내고 있는 상황. 그렇다면 '곡성'이 지닌 스토리와 상징들에 대한 감독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미워하는 것도 죄라면’

크게 보자면 '곡성'은 사람의 분노와 미움이라는 감정에 대부분 초점을 맞추고 있다. 영화 속 살해를 일삼으려는 자들(좀비?)은 이유를 모를 격양됨과 증오에 찬 상태이기에 그렇다. 마치 맹수들이 그렇듯 사나움을 갖고 있는 것. 이를 표현하기 위해 필요했던 수단은 '악' 혹은 '악의 세력'이었다. 어떤 묘한 광기에 사로잡힌 인물들로 인해 마을이 살인사건 바람에 휘말린다는 도입부는 ‘왜 이런 악행이 벌어졌고 미움도 죄인가'를 나타내기 위한 전초전으로 분석된다.

즉 ‘곡성’은 마을 사람들을 지키려는 ‘선의 상징’과 마을 사람들을 몰살시키려는 ‘악의 상징’의 충돌 구조를 띄고 있다. 이는 갈등을 빚어내므로 극의 흥미를 높이는 증폭제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영화 속에서 나타란 ‘악의 상징’이 더욱 공포감을 풍기는 이유는 원래 악에는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순수 악’이라는 표현처럼 어떤 명분이나 뜻을 지니고 악행을 벌이는 것이 아닌 ‘악’은 그 악행의 계기를 유발시키는 근본 그 자체에 가깝다. 그러므로 무서울 수밖에 없다. ‘악’이란 공포를 일으키는 주체가 아닌 공포 그 자체이기에 그렇다. 즉 ‘곡성’의 시각으로 바라보자면 사람의 분노와 미움과 증오는 ‘악’의 어떤 계획과 절차에 의해 인간에게 마치 바이러스처럼 퍼져 오르는 정념이다.



이처럼 ‘곡성’의 열린 구조로 인한 궁금함과 의구심은 대부분 ‘미워하는 것도 죄’라는 메시지로 어느 정도 해석이 될 수 있다. 영화를 감상한 관객들은 ‘도대체 종구(곽도원)의 죄가 무엇이냐’는 수많은 질문을 내비친 바 이같은 해석을 이에 대한 일종의 대답으로서 도움이 될 가능성이 높다. 종구는 외지인(쿠니무라 준)을 향해 끝없는 분노와 증오심을 표출한 바 있기에 그렇다. 작품 속 선과 악의 충돌 역시 사람과 사건을 바라볼 때 미워하려고 하느냐와 측은지심하려고 하느냐에 차이로 구분될 수 있다. 미움은 시기와 질투 등의 부정적인 감정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측은지심은 이해하려고 하는 공감에서 시작되는 측면이 강하기 때문이다.

더불어 ‘곡성’은 한 마을 공동체와 그 공동체의 소속된 한 가족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다. 이는 사회를 축소시킨 일종의 은유로 해석될 수 있다. 강물이 모여 바다가 되듯 마을이 모여 도와 시가 되고 도와 시가 모여 하나의 사회 공동체를 이루는 이치와 같다. 이 해석이 옳다면 영화 속 ‘마을’의 살인사건과 악행은 미움이 팽배한 현시대의 사회상을 은유하고 있는 셈.

그렇다면 우리가 ‘곡성’을 보고 느끼는 공포는 그저 판타지라서가 아닌 미움에 대한 고찰을 현실감을 놓치지 않고 풀어냈기 때문이 아닐까. 이 같은 ‘분노의 세태’를 확장시켜 인간을 결국 파멸 시키려는 ‘악’과 ‘증오의 열병’을 축소시키고 인간을 지켜내려는 ‘선’이 충돌하고 있다면 나홍진은 ‘곡성’을 통해 묻는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인 무엇인지. 이에 대한 인간의 의지와 선택은 어디까지 가능한지. 어떤 철학자의 말이었던 것 같다. 세상은 신과 악마의 전쟁터라고. 그 전쟁의 승자와 패자가 나뉠 때마다 인간의 행복과 불행도 결정된다는 상상.



중요한 건, 사람에게는 그저 순리대로만 따라가는 타성이나 수동성 외에도 쟁취하고 개척할 수 있는 능동성과 의지 또한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이 차원에서 ‘곡성’은 어쩌면 ‘사람이 사람을 미워하지 않을 수는 없을까’라는 고민에서 시작된 이야기일 수도 있다. 이 작품을 보면 역설적으로 종구와 종구의 가족과, 마을 사람들이 부디 불행하지 않길 절절히 바라게 되기 때문이다. 물론 ‘열린 해석’을 지닌 ‘곡성’의 특성상 필자의 분석 외에도 어떤 의미와 해석도 각기 가능하겠으나 나홍진 감독은 다양하고 새로운 해석과 담론을 위해 이같은 구조를 만든 것만큼은 확실해 보인다. ‘곡성’의 스토리가 명확하게 결정지어지지 않고 모호한 것은 작품의 스토리와 메시지가 하나로 규정되거나 닫혀 지지 않기를 바란 의도가 분명히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쓰면 나홍진 감독의 진짜 의도는 이 영화에 대한 관객들의 ‘다채로운 관점과 새로운 해석’(그 겨냥)에 있다. 그렇게 우리가 그의 미끼를 ‘제대로’ 물었다면 ‘곡성’은 그 수많은 담론을 통해 더욱더 확장될 터. ‘미움은 어디에서 비롯되고 분노로 가득 찬 세상은 어떻게 구원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과 함께. ‘곡성’이 작품의 강점과 특성을 통해 한국 장르영화에 어떤 놀라운 획을 긋게 될지 귀추가 주목된다.

(사진='곡성' 스틸컷)

 

소준환기자 akasoz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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