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터뷰]‘밀정’ 송강호 “이정출, 적도 동지도 아닌 현실적 인물...디테일 필요했다”

기사 등록 2016-09-02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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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데일리 한해선기자] 1923년 일제강점기. 조국을 되찾고자 하는 열망 하나로 적극적인 투쟁을 벌이는 이들이 있는 반면, 이미 어떠한 한국인들은 제 목숨 하나를 위해 국민 전체를 팔아넘기는 일본인으로 둔갑하기도 했다. 이정출(송강호 분)은 일본 경찰의 삶을 택했다. 술술 쏟아내는 일본어와 제복으로 겉모습이 포장된 이정출의 속내는 무엇이었을까. 국가, 그리고 의열단 리더 김우진(공유 분)을 향한 진짜 꿍꿍이가 궁금하다.

이슈데일리는 최근 서울 종로구 삼청동 한 카페에서 송강호와 영화 ‘밀정’(감독 김지운)을 이야기 하며 다시금 영화와 과거사를 곱씹어봤다.

“항일과 친일 사이의 캐릭터가 확실히 독특하기는 하죠. 드라마에서 작은 캐릭터들은 있을 수 있지만, 전면에 그런 캐릭터를 내세운 건 ‘밀정’이 처음이에요. 그 점이 가장 매력적이었어요. 이정출은 이분법적으로 적과 동지를 굳이 나눈 게 아닌, 적도 아니고 동지도 아닌 현실적인 면을 관통한 캐릭터에요. 과거 그러한 인물들은 분명 내적인 고뇌와 갈등, 회오리가 존재했을 거예요. ‘밀정’은 그런 부분을 집중적으로 다룰 수 있는 드라마였다고 생각해요.”




송강호와 어느덧 20년간 함께 작업해 온 김지운 감독은 ‘밀정’을 통해 그전과는 확연히 다른 새로운 시각으로 작품을 대했다. 작가적인 욕심보다 시대적인 분위기, 시대의 아픔을 관객들에게 보다 대중적으로 전하려 했다. 그러한 의도는 이정출에 집약적으로 드러났다.

“‘놈놈놈’(‘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2008) 이후 8년 만에 함께 작업하게 됐네요. 김지운 감독은 장르의 변주를 참 잘하는 대가인 것 같고, 작가적인 야심도 항상 남달랐던 것 같아요. ‘밀정’은 감독 개인적인 야심과 욕망보다 관객들과 소통을 시도한 거죠. 일제시대의 어두운 면을 정통법으로 선보였어요.”

이정출은 1920년대 당시 의열단의 제2차 국내 거사계획 실행요원 ‘황옥’이라는 실존 인물을 기반으로 재탄생됐다. 그간의 작품에서 캐릭터에 최대 초점을 맞춰 연기해온 송강호는 이번에 이정출이라는 인물 자체보다 그가 그렇게 살 수밖에 없던 시대의 아픔을 포괄적으로 이야기하려 했다. 시대 속에서 조국과 개인은 무엇인지, 어떠한 연관이 있는지를 고민했다.

“이정출이라는 인물은 시대가 낳은 모호한 인물이고, 심증만 드러내면서 막연한 시대까지 보여줬다고 생각해요. 실존인물을 연기하며 제 작은 능력으로 큰 분들의 능력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을지에 대한 부담감은 있었어요. 촬영을 하면서 서대문 형무소에 처음 가 봤는데, 그런 잔혹한 곳에서 옥고를 치르고 고통의 시간을 보내다 돌아가신 분들을 떠올려보니 연기하면서도 기분이 남달랐던 것 같아요.”

“특히 이정출은 내면을 감추는 인물이기 때문에 디테일한 연기가 더 필요했던 것 같아요. 저도 신경을 많이 썼죠. 처음 김우진을 만난 시퀀스 속의 이정출의 모습이 굉장히 중요했어요. 이정출의 냉정하고 속을 알 수 없는 모습은 김우진(공유 분)을 만났을 때 가장 잘 드러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입체적으로 담으려 노력했어요.”




초반에 차가운 일본 경찰로 얼굴을 내민 이정출은 김우진과 점차 관계를 쌓아가며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낸다. 입체적인 캐릭터 변화가 송강호만의 물 흘러가듯 자연스럽고 유머러스한 연기력으로 나타난다는 점에서 ‘밀정’은 훨씬 흥미로운 교차점을 지닌 영화가 된다.

“제가 굳이 의도적으로 관객들에게 쉬어갈 수 있는 부분을 주기 위해 그렇게 연기한 건 아니예요. 유머는 삶의 희로애락 속에 포함된 감정이잖아요. 즐겁고 행복한 순간에도 우울한 구석이 존재하듯이 밀정의 아이러니한 유머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발생할 수 있는 자연발생적인 유머일 수 있는 거죠.”

이정출은 암울한 시대 속 켜켜이 쌓인 갈등과 일제가 지닌 마음의 빚이 거쳐나가는 인물이다. 김지운 감독은 “이 영화는 차가움으로 시작해 뜨거움으로 끝나는 영화다”라고 소개한 바 있다. ‘밀정’은 일제시대 속에서 표현할 수 있는 일종의 콜드 누아르다.

“촬영 당시 실제로 춥기도 했는데, 이야기가 점점 뜨거워지니까 연기를 하면서도 자연적으로 그런 감정을 느낀 것 같아요. 애초에 ‘밀정’은 신파적인 요소를 가지고 출발하지는 않았어요. 찍다보니 감성이 풍성해진 거죠. 누아르를 제대로 표현하고 싶었어요. 이정출이 여직원을 돌려보내고 홀로 사무실에 앉아있는 장면은 심적인 동요, 인간적인 풍모가 점점 살아난 지점이라 생각해요. 홀로 밤거리를 거니는 장면을 굳이 보여준 것도 그런 변화를 담으려 한 거죠.”

영화에서 이정출과 가장 많은 교류를 하는 인물은 김우진. 가장 대비된 지점에 선 두 사람의 관계를 그리며 ‘밀정’은 한계에 처했을 때 나타날 수 있는 다양한 인간군상을 표현하면서도 이면의 근본에는 공통된 시대적 아픔을 강조하려 했다.

“공유 씨는 제가 우스갯소리로 다슬기 같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만큼 첫 이미지가 너무 맑은 친구였어요. 인성이나 생각이 굉장히 깨끗했죠. 그 느낌이 김우진과 너무 잘 맞았던 것 같아요. 올바른 신념까지도요. 제가 김우진 역을 하면 뭔가 우여곡절과 전사(前事)가 있을 것 같은데,(웃음) 공유 씨는 순수결정체 같은 느낌이었어요.”




영화는 송강호, 공유를 비롯해 한지민, 그리고 특별출연한 이병헌까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명품배우들이 쉴 틈 없는 극적 전개를 펼친다. 공유, 한지민과는 첫 호흡이지만 이병헌과는 ‘공동경비구역 JSA’(감독 박찬욱, 2000) ‘놈놈놈’을 통한 오랜인연이 있다.

“반갑고 웃겼죠. 리허설 때 ‘오랜만이다 박창희’라고도 했고요.(웃음) 세 번째 함께 촬영하게 됐는데, 워낙 좋아하는 후배라 천군만마를 얻은 느낌이었어요.”

“이정출이라는 인물은 연계순(한지민 분)에 비하면 오히려 작은 인물인 것 같아요. 저는 사실 어떻게 보면 연계순이 이 영화의 주인공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 했어요. 그렇게 많은 분량은 아니더라도 연계순이 시대를 가장 잘 상징한 것 같았거든요. 이정출이 뒤늦게 연계순을 보고 고통스러워한 것은, 작고 가냘프고 힘없는 차가운 손을 한 번도 잡아주지 못했다는 슬픔이 컸기 때문이었을 거예요. 가장 보호받고 힘을 얻었어야 하는 우리 민족의 자화상 같은 인물인 것 같아요. 연계순은 조국에 대한 연민을 자아내는 인물이죠.”

“하시모토(엄태구 분)는 하시모토대로 불쌍한 인물이에요. 조선인이 조선인을 죽이게 하는 이이제이(以夷制夷)에 희생당한 인물이잖아요. 모두가 비극적이었던 것 같아요. 엄태구 씨는 ‘잉투기’, ‘차이나 타운’에서 에너지 넘치는 연기를 했던데, 이번 기회로 큰 규모의 작품에서 제대로 잠재력을 보여준 것 같아 기뻐요. 실제 엄태구 씨는 말수도 많지 않고 조용하죠. 술도 못 먹어서 하시모토와 매치가 잘 안된다니까요.(웃음)”

역사적 실화를 다루며 배우들 모두 있는 힘껏 열연을 쏟아냈다. 그 중 단연 돋보인 존재감을 드러낸 송강호는 ‘밀정’을 통해 연기 면에서는 물론, 역사와 삶 전반을 심층적으로 고찰하는 계기를 또 한 번 만났다.

“과거를 떠올리며 미래까지는 모르겠지만, 현실을 살아가는 모습에서 삶의 지혜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사도’(감독 이준익, 2015)를 통해서도 많은 분들이 그런 말을 해주시더라고요. 영화를 통해 새로운 각도로 사도의 마음을 접하니 개인적으로 느끼는 감정들이 또 달라지더라고요. 시대극을 하니 지나왔던 삶을 반추하며 느끼는 새로운 가치관이 생기는 것 같아요.”


(사진=워너브라더스 코리아 제공)

 

한해선기자 churabb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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