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데일리

[이슈인터뷰] ‘허스토리’ 김희애, 35년 연기 내공 ‘장인 손길’로 묻어났다

기사 등록 2018-06-19 09:10

Copyright ⓒ Issuedaily. 즐겁고 신나고 유익한 뉴스, 이슈데일리(www.issuedaily.com) 무단 전재 배포금지

▲ 사진=YG엔터테인먼트 제공
[이슈데일리 최하은기자]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이 세상에 존재할까. 35년째 여배우로 살아가는 김희애는 방부제 미모와 함께 한결같이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배우로 사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라고 이야기를 할 수 있을만한 ‘자격’이 되는 사람으로 느껴졌다. 그런 그가 우리나라의 가슴 아픈 역사를 담은 영화 ‘허스토리’로 연기 인생에 있어 중요한 전환점을 맞았다.

15일 오후 서울 종로구 삼청동에 위치한 웨스트 19에서는 영화 ‘허스토리’의 개봉을 앞둔 배우 김희애를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다.

‘허스토리’는 1992년부터 1998년까지 시모노세키와 부산을 오가며 일본 재판부에 당당하게 맞선 할머니들과 그들을 위해 함께 싸웠던 사람들의 뜨거운 이야기를 담은 영화다. 김희애는 영화를 보고 어떤 생각이 스쳐지나갔을까.

“어제 두 번 봤는데 보고 나니까 제 연기는 구멍이 많이 보이더라고요. 그런데 선배님들의 연기는 두 번 봤을 때가 더 좋더라고요. 저도 노력은 했다고 하지만 명함을 못 내밀겠어요. 연기 할 때 잠시라도 딴 생각을 하면 (선배님들처럼) 그런 눈빛이 나올 수가 없어요. 촬영할 때 엄청 수줍어 하시면서도 완벽하게 해내시는 모습을 보고 뿌듯하고 나이에서 오는 연륜은 역시 무시할 수 없어요.”

극중 김희애는 위안부 할머니들을 돕기 위해 발 벗고 나서 고군분투하는 여행사 사장 문정숙으로 분했다. 진취적이고 ‘쎈’ 여성의 분위기를 자아내는 문정숙은 평소 김희애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느낌을 주는 캐릭터였다.

“이번에 녹음하면서 목소리 모니터링을 했는데 좀 더 성량을 끌어올리려고 했어요. 제가 그렇게 (성량이) 낮은 줄 몰랐어요. 더해도 될 뻔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더라고요.”

기존에 다뤄졌던 위안부 소재의 영화와 차별화된 점이 있다면 바로 ‘시간’이다. 과거의 아픔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위안부 할머니들의 현재의 삶부터 시작해 조금씩 아픔이 드러나는 구조다. 자칫하면 본질을 잃어버릴 수 있는 구조적인 부분에서 민규동 감독은 특유의 섬세함으로 꼼꼼한 연출을 감행했다고 한다. 김희애는 민규동 감독에 대해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민규동 감독님은 꼼꼼하신 걸로 유명하신 분이세요. 배우로써는 너무 힘들었지만 그게 감독님의 최대의 장점이 아닌가 생각해요. 그런 에너지가 어디서 나오는지 궁금해요. 굉장히 외소하시고 어린왕자 스타일인데 ‘괴력’이 존재하세요. 굉장히 오버하지 않고 섬세하게 연출하신 것 같아서 작품 선택할 때도 이 부분이 크게 작용했죠.”

인터뷰 내내 김희애는 선배 배우들을 자주 언급했다. 특히 이번 영화 촬영에서 함께한 김해숙, 박정자를 언급하며 존경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김희애는 선배들과 함께 한 이번 영화 촬영이 ‘특별한 현장’이라며 애정을 표했다.

“무척 특별한 현장이었어요. 요즘엔 어디 현장에 가도 제가 가장 연장자인데 선생님들과 함께 하니 귀한 시간이었죠. 저에게 다시 이런 현장이 있을까 싶어요. 잊지 못할 경험이었죠. 김해숙 선배님은 그런 에너지가 어디서 나오시는지 정말 대단하신 것 같아요. 연기도 최선을 다하시고 그 외에 관계적인 부분에서도 최선을 다해 주세요. 훌륭한 배우는 자기 할 일만 하고 끝나는 게 아닌 것 같아요. 주위를 잘 둘러보고 동료를 잘 챙기시거든요. 또 박정자 선생님은 대한민국 최고의 배우시잖아요. 내공과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가 계셨어요. 연기생활을 오래했지만 오랫동안 일을 할 수 있다는 건 노력, 성실함이 합해졌기 때문에 존재하시는 거라고 믿어요.”

극중 문정숙이 할머니들의 일에 자신의 일처럼 발 벗고 나서는 이유를 “죄스러워서”라는 대사 한 마디로 정리하는 장면이 나온다. 조금 다른 접근 방법이긴 하지만 김희애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용기있는 행보에 대해 존경심을 표했다. 이것이 김희애가 이번 연기를 통해 관객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것인 듯 했다. “할머니들의 용기있는 행보는 인정받아 마땅하다”라고 말이다.

“아주 불우한 시절에 태어나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을 겪으시면서도 이겨낸 한 인간의 모습을 볼 수 있었어요. 한국 경찰서만 가도 떨릴 것 같은데 일본 재판장에서 당당히 말하신 거잖아요. 시모노세키라는 지역이 극우세력이 가장 많고 지역 색이 강하다고 들었어요. 거기서 일부 승소를 받아냈다는 건 대단하신 거예요.”

함께 촬영했던 배우 김해숙은 배우들이 연기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처절하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그만큼 자신의 모든 것을 다해 연기에 혼을 쏟아 부었다는 이야기였다. 김희애는 문정숙 역할을 위해 10kg을 찌우고, 일본어와 사투리를 넘나드는 대사를 소화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자신의 에너지를 소모해가며 작품을 준비하는 시간이 배우에게 있어 가볍고 좋지만은 않았을 터다.

“저는 할머님들처럼 아픔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역할인데도 하루 하루가 힘들었어요. 준비하면서도, 촬영하면서도 너무 힘들어서 벅찬 느낌이었지만 도전이기도 했죠. 마지막 재판 장면촬영이 끝나는 마지막 날 촬영을 마치고 분장실에 들어왔는데 허무하면서도 시원한 감정이 확 터지면서 카타르시스를 느꼈는지 눈물을 주체할 수 없이 흘렸어요. 돌이켜보면 제 나이에 중압감을 이겨내고 일을 끝내고 울 수 있다는 건 행운이에요. ‘김희애 멋있다’라고 생각했죠 (웃음)”

35년간의 연기 생활. 한 분야에 10년 이상 기술을 갈고 닦으면 ‘전문가’라는 타이틀을 거머쥘 수 있다고 한다. 김희애는 과연 연기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이 자리를 나무처럼 지켜온 걸까.

“제가 어렸을 때는 배우라는 직업에 ‘올인’하는 스타일이었어요. 그런데 어떤 한 가지에 올인 하는 것도 병이 걸릴 수가 있어요. 남녀 간의 사랑이라고 치면 사랑은 옮겨가잖아요. 상대방은 변했는데 나만 아직도 사랑하면 얼마나 사람의 인생이 피폐해지겠어요. 그 상태에서 헤어지면 짝사랑 하는 사람의 인생은 없어 지는 거죠. 내 생활이 박혀 있어야 건강한 관계가 되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배우가 내 인생의 전부야’라고 생각하면 건강하지 못할 것 같아요. 배우로 산다는 건 장단점이 있어요. 나쁜 것은 사생활이 알려지고, 말로 상처를 받는 큰 아픔을 경험해야 한다는 거예요. 저도 지금은 많이 숙성됐는데 보통 일이 아니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기를 하는 건 축복받은 일이죠. 저는 다시 태어나도 또 연기를 하고 싶어요. 굉장히 매력적인 일이거든요.

김희애는 중년 여성 배우들이 설 수 있는 현장의 입지가 넓어지는 것에 대한 바람을 드러내기도 했다. 35년간의 그의 연기 행보는 그렇게 말할 수 있을 만한 자격이 된다. ‘새로운 것’만 추구하다가는 자칫 ‘장인’들의 연기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적어질 수 있기 때문. 한 단계씩 쌓아온 그의 꾸준한 행보가 이제는 영향력으로 응집돼 현장에 기분 좋은 변화를 이끌어내길 기대해 본다. 더불어 영화 ‘허스토리’는 그 변화의 출발점에 서 있을 것이다.

“장인들이 만든 귀한 것은 그 어떤 것으로도 바꿀 수 없어요. 그걸 만들기 까지는 너무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거든요. 사실 중년 여성배우들이 작품을, 그것도 주연으로 나올 수 있는 기회가 적어요. 옛날에 김영애 선생님이 아프셨을 때 ‘여한 없이 해서 아쉽지는 않지만 나 같은 배우 하나 나오려면 몇 십 년 걸리는데 아깝다’고 하신 것이 기억나요. 그게 무척이나 와 닿더라고요. 막 담근 것보다 숙성된 술이 향, 맛 모든 면에서 좋은 것 처럼요.”

최하은기자 rinon95@naver.com